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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적:관광명소

  • 양명학의 선구자 南彦經(남언경) 관리자
  • 2010-07-13 5169
  • 남언경의 자는 時甫이며 호는 靜齋·東岡이고 본관은 宣寧이다. 1528년(中宗 23) 12월 25일에 乏믓州牧使로 있던 南致局의 두째 아들로 태어났다·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지혜가 밝아 주위로부터 그의 기상을 비범히 여겨 장차 큰 인물이 되리 라는 세평을 받았으며 소년시절에 花潭 徐敬德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면서 朴淳 許曄 朴民獻등 당대의 뛰어난 재목들과 교류하며 학문의 깊이를 넓혀왔다고 그의 孑刊犬과 東儒師友錄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 다.

    그는 이곳에서 心誠學에 대한 여러가지 학설을 익히며 여러 석학들과 가까이 하면서 陽明學에 대 한 깊은 이해와 연구가 있였던 관계로 그는 누구보다도 新思潮에 깊은 매력을 느끼면서 부터 특별한 시 각으로 陽明學을 수용하고 선도해 왔음은 이미 세상에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후세의 학자들이 그를 최초의 陽明學者로 지청하고 있다.

    19세 되던 해인 1546년(明宗 2)에 洪仁祐와 더불어 許晫의 집에 갔다가 孟子의 浩然章과 心經附註 를 강론한 일이 있는데 이 때 洪仁祐는 그의 높은 학문과 밝은 기상에 매흑되어 감탄한 나머지 집에 돌 아간 뒤 부모님꼐 이 사실을 알려드리고 그를 친매부로 삼았는데 이를 미루어 보더라도 그의 사람됨과 학문의 비범함이 대단한 인물이였음을 잘 알 수 있다.이 때를 회상하며 洪仁祐가 기록한 恥齋日記를 보면 朴淳과 더불어 학문을 討論하는데 밤이 깊음 을 깨닫지 못하였다고 하며, 뿐만 아니라 退溪 李滉과 더불어 토론할 때도 밤을 지새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 退溪는 大司成이란 높은 직위에 있였으나 젊은 청년과 더불어 학문을 논하면서 밤을 지새 웠다 함은 이미 東岡이 학문에 대한 높은 식견에 있였음을 나타내는 좋은 실례라 하지 않을 수 없다.東岡은 이때에 이미 退溪·栗谷·牛溪등 훌륭한 석학들과 교류하고 때로는 강론하면서 陽明學에 대한 필요성을 역설하고 제고시켰던 것으로 여겨진다.

    1566년(明宗 21) 그의 나이 39세시에 經明行修로 특별천거되어 李恒·成運·폐多·林薰·金範·韓臍등과 더불어 布衣로서 임금 앞에 入對되었는데 이는 무엇보다 東岡의 冶道와 哲學을 강론함이 누구보다 뛰어나고, 또한 그의 才質을 크게 가상된 것으로 인 정받아 특별히 등용된 것이고, 그로부터 그는 정치의 길로접어들게 되였고, 이를 계기로하여 그는 獻陵參奉이 되였다가 工曹左郞에 이어砥平縣監이 되였다.

    1568년(宣祖 2) 40세 되던 해에 李珥·奇大升·盧守愼·尹斗壽·尹根壽·李濟臣·李山海·崔慶昌 등과 더불어 製述官이 되어 明나라 사신들을 접민하면서부터 陽明學에 깊이 접근할 수 있는 더욱 좋은 계기가 되였으며 한편으로는 더욱 많은 名流들과 교류를 하게 되였고, 이때에 이미 그의 門徒는 盛市를 이를만큼후생교육에도 심혈을 기울여 왔음을 알 수 있다.

    1571년(宣祖 4) 44세에는 淸風郡守가 되고,46세시에는 楊州牧使가 되어 道峰書院을 창건하였으며, 이 때 그의 높은 학문과 재질을 인정한 李珥·盧귀眞등의 추천으로 그는 枓試出身이 아니면서도 憲官이 되어 司憲府 持干·掌令을 거치고 다시 내섬시·장락원·사복시 正이 되었다.1578년(宣祖 12) 부인을 사별하고 1581년 사헌부 執義로 있을 무렵 栗谷 李珥와 더불어 당맹에 휘 말린 松江 鄭澈을 구하려다가 파직되어 坡州牧使로 나갔으며,1585년(宣祖 16)에 全州府尹이 되였다가 工曹參議가 되였다.

    그러나 1588년(宣祖 22)에 일어난 鄭汝立의 모반사건이 진행되는 동안 東岡이 3년전 全州府尹으로 있던 시절에 倭寇를 토벌한 鄭汝立의 壯才를 가상히 여겨 시 한구절을 지어 격려해 준 일이 문제가 되 어 미佳咸등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으머, 사헌부 持平으로 있던 姜燦등의 救解로 해원은 되었으나 이 를 계기로 士林등에서 배척되는 아픔을 겪기도 하였다. 1589년(宣祖 23) 東岡 南彦經은 드디어 紅塵을 떠나 가평군 설악면 이천리 영천부락으로 낙향하기에 이른다.물론 이곳 이천리로 낙향하는 뜻은 終老의 計를 삼고자했던 연유도 있였으나 무엇보다 倭亂이 있을 것을 예견한 피란이기도 하였다.

    1592년(宣祖 26)에 동강이 예견했던대로 드디어 倭亂이 일어났는데 그는 朴淳·鄭曄ㅑ·金尙容등 피난중인 士大夫들을 규합하여 義兵을 봉기하고, 인근 지역인 洪川·春川·加干·楊根등지에서 勤王兵을 모집한 결과 360여명이나 되는 의병을 모았다고 한다.그 후 의병들을 이끌고 곳곳으로 옮겨가머 倭賊과 싸워 혁혁한 전과를 얻기도 하였으며, 이 결과로 再起의 발판이 구축되는 기회가 다가오고 있였다.이 때 중국 明나라에서는 왜군을 물리칠 수 있도록 將軍을 보대 주었는데 동강 남언경이 그토록 숭 상하던 陽明學에 대한 권장이 함께 온 明나라 王學者들에 의하여 표명되기 시작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문하생인 李瑤가 임금이던 宣祖大王 앞에 나아가 陽明學을 찬양하기에 이르고, 王世子로 하여금 明나라 에 使行하여 明朝의 心止學者들을 만나야 한다는 건의가 받아들여 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東岡은 이러한 사실도 모른 채 1594년(宣祖 28) 5월 26일 향년 65세를 一期로 陣中에서 病沒하고 말았다.묘는 설악면 이천리 영천마을에 있는데 묘지는 이미 동강이 卜居地로 삼았던 곳이라고 이른다. 1694년(肅宗 21) 12월 설악면 迷源書院에 配享되어 현재에도 매년 음력 8월中丁日에 지방유림 들이 배향을 드리고 있다. 配位 南陽洪氏는 洪德演의 女이고 繼配 天安全氏는 中郞뎌將을 지낸 全琯의 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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