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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문화유적:관광명소

  • 독림당 참모장 신숙 관리자
  • 2010-07-13 5026
  • 신숙(申肅)의 본명은 신태련(申泰鍊)이요, 호는 강재(剛齋)이고, 본관은 平山으로 1885년 12월 29일 가평읍 읍내리 향교리에서 신석범의 아들로 태어났다.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글읽기를 즐겨하였지만 가정이 빈곤하여 학업을 이루지 못하다가 이 소식을 접해들은 가평지역의 대학자로서 이름이 뛰어났던 북면 목동리에 거주하며, 한문서당을 경영하던 이규봉이 그를 데려다가 무보수로 가르쳐 주기로 하니 그는 그 덕으로 소학·대학등 사서삼경을 배우고, 각종 예서와 역사도 배우는 계기가 되었다.

    1901년 북면사무소 약정(約正)이 되고 다시 내서면 약정으로 옮겼다가 군서기가 되어 2년간 종사하 였다. 1903년 12월에 동학(東學)에 입교하고 1905년 봄에 집을 떠나 상경하여 잠시 순경으로도 있었으 나 부패에 물든 인사조치에 분개하여 곧바로 사직하고, 국민신보기자와 탁지부 인쇄국 교정원으로 있었 다.

    이 당시 그는 후생교육에 뜻을 두어 김남수·김남로와 더불어 문창학교를 설립하고, 교감으로 취 임하여 학교운영에 힘을 기울이기도 하였다.1909년 당시 동문수학하던 정한교와 밀의하여 매국적신인 일진회장 이용구를 살해할 계획을 세우 던 중 이재명의 매국노 이완용 자살사건이 발생하여 일제의 경계가 너무도 삼엄하여 계획을 실행치 못 하기도 하였다.

    1912년 천도교 중앙강습소 간사로 었다가 도사실 서계원으로 있었으며, 1914년 봄에 는 대구교구장에 임명되고 이어 중앙대종사 종법원겸 외사원이 되었다가 중국 봉천성 장백현 교구에 들 어가 천도교인을 압박하고 있던 기독교인들과 현지사를 만나 교섭한 끝에 원만한 해결을 보기도 하였 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날때인 2월 28일밤 민족대표이던 손병희지시에 의하여 보성사에 문선공으 로 있던 김영륜과 함께 독립선언서 2만여매를 인쇄하여 분급한 죄로 붙잡혀 3개월간의 옥고도 겪었다.1920년 상해에 있던 임시정부로부터 천도교의 대표적 인물의 파견요청에 의하여 밀입국하게 되자 그는 이름를 숙(肅)으로 고치고 4월 23일 신상태와 함께 만주를 거쳐 상해로 들어갔다.1921년 4월에 러시아·만주·하와이에 거주하고 있던 동지 8개 단체의 대표로군사 통일회의가 북경에서 개막되었을 때 그는 통일당의 대표로 의장에 당선되었다.

    1923년 1월 3일 국민대표회외(군사통일회의의 개편체)는 국내외에 산재해있던 여러 단체의 대표들 로 140여명이 참석하였는데 의장에 김동삼·부의장에 윤해·안창호를 선출하고, 각분과위원회를 구성하 였으나 각 파의 의견대립으로 인하여 김동삼이 사퇴하니 그는 다시 부의장이 되어 헌법초안을 통과시킨 후 헌법에 의하여 조선인민공화국을 창립하고, 국민위원 30인을 선출하였으며, 그중에서 5인의 국무집 행위원으로 선발할 때 그는 내무위원이 되었고, 외무는 김규식·군무는 이청천이었다. 이때 신숙이란 이름을 신태치라 고치고 강재란 호를 시정(是丁) 또는 치정(癡丁)으로 변경하였다.

    1930년 7월 3일 북만주 각지에서 연락된 동지들이었던 정신·이원방·이방마등 40여명이 한국독립당 을 조직하였을 때 정치부장을 맡았다가 다시 민중위원장이 되었다. 이듬해 동북사변이 일어나자 한국 독립당에서는 독립군을 편성하고, 군사위원장이던 이청천을 총사령으로하여 조직을 개편했는데 그는 참 모장이 되었다.

    1932년 9월에는 항일 길림군과 연합하여 쌍성현 공략에서 대전과를 올렸다.1933년 1월 1일 독립군을 대표하여 구국군과 합작을 위해 액목현으로 갔다가 5월 3일 상해에 도착하여 신한혁명당 간부들이던 윤 기섭·신익희등과 두당의 통합강화를 추진하고, 중국 군사위원회 주덕배상장과 면담하여 한국독립군의 작전계획을 제출하고 원조를 요청하고 다시 만주로 오는 도중에 12월 4일 영구에서 왜경에 체포되었으 나 이름을 변경한 덕으로 이듬해 3월 석방되었다.

    1945년 하얼빈에서 재만동지회를 조직하고, 위원장이 되어 홍윤을 관내로 파견시켜 광복군 본영과 연합작전을 계획하던중 조국의 광복을 맞이 하였다.그는 8월 26일 조직한 길림성 한국인회 위원장에 피선되어 피난민의 구제와조국해방으로 귀국하는 동족들의 승차는 물론 귀국방법들을 알선해 주는데 활 략하였다.

    1946년 8월 20일 동북한민총회장에 당선되고 11월에 봉천을 출발하여 천진에 가서 당시 그 곳에 있던 미군정 출장소에 들어가 동북지방에 거주하던 우리교포들의 어려운 상황과 사경에 놓여있던 난민 15,000여명의 구출과 수송을 요청하여 승락을 받고 그는 다시 상해를 거쳐 12월 29일 부산항에 도 착 귀국하였다.

    1947년 입법의원이 되고, 이듬해 4월에는 남북협상을 위하여 김구·김규식과 함께 평양에도 다녀왔 다. 1949년 1월 천도교 도사(道師)로 선임되어 교화운동 차원으로 조직된 만화회 위원장이 되었다.

    1958년 보국연맹과 천도교 청년회를 발전적 차원에서 해산하고, 동학회 중앙본부 위원장으로 취임하였 다가 동학당준비위원회 대표지도위원이 되었다.

    그 후 서상일·김성수·조헌식·김성숙·안호상등과 더불어 민주혁신당을 조직하고 중앙위장에 취임하여 자유당 독재정권에 대항하다가 정계에서 은퇴한 후 민권수호 국민총연맹 대표지도위원이 되고 광복동지회를 창립 부회장으로 있다가 1967년 11월 22일 향 년 82세에 영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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