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분(李汾)의 자는 계빈(季彬)이요 본관은 전주(全州)로서 효령대군 이보의 손자이자 원천군 이의의 아들로 1452년에 태어났다.그는 나면서부터 천품이 뛰어났으므로 소년시절에는 이미 종실의 큰 기대를 모았고, 효령대군도 특별히 총애하였으므로 평시에도 항상 곁에 있게 하였으며 대군이 입시(入侍)할때도 함께 행하도록 하는 등 각별한 대우를 받았다고 한다.
당시 조정의 제도가 만 15세 미만에는 수직(授職)이 허락되지 않았는데 그의 나이 13세(1465년)에 가은감(加恩監)에 수직되었으며, 이어 창선대부로 승진되고 세조가 대군제에 이르시던 날 특별히 명선 대부로 특진되어 가은도정이 되었는데 이는 정삼품의 당상관직이었다.
1483년에 세조비인 정희왕후가 돌아가자 직언으로 발탁되었는데 이는 그의 나이에 비해 관직의 승급 이 빠른편이었다고 한다.성종임금도 그의 근심함과 예절의 법도가 바른것을 알고 특명으로 정의대부 에 오르고 이어 가은군에 봉해졌으며 다시 중의대부에 승진되었은데 모두가 임금의 특별한 배려 덕분이 었다.
그는 일찌기 친상을 입었으므로 조부인 효령대군의 교훈으로 스승을 만나 학문을 익혔는데 매사 를 순수하고 삼가하며 말이 적었으며, 의복은 사치하지 않고, 또한 문예에 뛰어났는데도 활쏘기를 즐겨 하여 여러차례나 큰 상을 받기도 하였다.1486년(중종 1) 효령대군이 세상을 뜨니 그는 심히 슬퍼하여 조문객들마저 크게 감탄했다고 하며 상을 치루는 동안 모두가 형제처럼 일들을 도왔는데 이는 모두 그의 우애와 화목에 기인함이었다.
1505년에 옥사가 일어나자 연산군이 영을 내려 크게 수색한 바 있는데 그는 이 일에 연루되어 잡혔다가 병이 들어 이듬해 2월에 54세로 별세하였다. 부인은 설봉박씨이며 슬하에 8남3녀를 두었다.묘는 설악면 신천리 세골 어구 능선에 있고, 묘앞쪽에 신도비가 있는데 글은 공조참의였던 이홍남 이 짓고, 글씨는 개성부유수인 이택이 쓰고, 머리글 전서는 통정대부 선공감정 이련이 썼다.
그의 비명에 이련글이 실려있다."아름다우나 累하지 아니하니검소함을 스스로 실행하였으며귀해도 교만하지 아니하고부해도 자랑하지 않았다.가문의 근본을 효도와 우애로 삼았으니耉로 인하여 中壽를 겨우 넘었으나 벼슬한 이들이 집안에 가득하고그뒤로 더욱 많아졌도다. 天品이 喪하지 아니하니 善에서 무엇을 또 더하리오여기 돌을 세워 새기면서도영원히 전해지기만 바랄 뿐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