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의 자는 백후(伯厚)이며 호는 잠곡·회정당(潛谷·晦靜堂)으로, 서기 1580년 선조 13년 7월14일 아버지인 참봉 김흥우(金興宇)와 어머니 조씨(趙光祖 선생의 증손녀)와의 사이에서 출생하였다.선생의 생애는 나라 안으로는 임진·병자란을 겪은 후 극도로 피폐해진 농업경제의 정비와 고갈된 국가 재정의 재편성을 해야했던 어려운 시기에 놓여 있었고, 밖으로는 원(元)·명(明)나라 교체기에 놓여 있어 미묘한 정국을 요리해 나가야 하는 복잡한 시기였다.더욱이 청(淸)나라에 지배를 받아야 했던 당시의 현실하에서 효종(孝宗)은 북벌(北伐)을 꾀하는 한 편 안으로는 나라를 바로 잡아야 되겠다는 의욕이 충만해 있었다. 무엇보다도 선생은 뼈대있는 집안의 후예라는 긍지와 뛰어난 천품으로 학문에 열중하였으나 청민한 가정에서 아버지마저 일찍 세상을 떠나 자 그 고통상은 이루 표현하기 조차 어려운 가난의 상황이었다.그러나 학문에 뜻이 있어 열심히 강독한 결과 10세 전에 이미 물리가 났다고 하며, 12세에 小學을 읽다가 터득한 바 있어 애물사상(愛物思想)이 투철해졌고 이로 인하여 후일에 경제사상의 주축을 이루 었다고 이르며, 또 한 남을 구할 근본정신인 민본사상(民本思想)의 기틀이 잡혔다고 이른다.13세 되던 1592년(壬辰年)에 아버지를 따라 임진란 피난길에 올랐다가 2년후인 1594년에 아버지의 별세를 당하여 할머니와 어머니·동생들을 거느려야하는 어려운 곤경에 처하여 가세는 말이 아니었으므 로 할 수 없이 서울에 사는 고모부 임경홍(任慶弘) 집에 의지하여 살아왔다.1605년 25세에 파평윤진사 汲(흡)의 따님과 혼인하여 二男四女를 두었는데 가평 잠곡(潛谷 일명 淸德洞 지금의 청평안전유원지 일대)에 은거하기전에는 三女뿐이었고, 장자 佐明(좌명 호는 歸溪 시호는 忠肅)과 차자 佑明(우명 호는 傾陽軒 시호는 忠翼公 淸風府院君 이조 顯宗의 國舅)은 가평 잠곡에서 출 생하였으며 차자는 선생의 숙부인 김흥록(金興祿)의 아들 金址에게 입양 출계시켰다. 잠곡선생이 가평군 청평 잠곡동에 은거하게된 동기는 먼저 성균관 태학생(成均館 太學生) 시절인 26세 때 사마시(司馬試 즉 生員)에 합격하고, 또 관시(館試)라고 부르는 성균관시(成均館試)에 장원하 였는데 이조 연산조(燕山朝)이래 거듭한 사화(士禍)로 말미암아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三賢(金宏弼·鄭汝昌·趙光祖)과 주자학의 대가인 이언적·이황(李彦迪·李滉)을 문묘(文廟=향교 즉 공자를 비롯한 성 현의 위패를 모신곳)에 함께 모셔 달라는 글을 학생들과 함께 왕에게 올렸고, 또한 우계(牛溪)선생의 억울함을 해명하는 상소를 올리는데 있어 항상 주동자 노릇을 하였으며 그 글은 모두 잠곡선생의 손에 의하여 쓰여졌었다.이 상소로 인하여 위의 다섯분을 전국 향교에 모시게는 되었지만 그 후 광해군에게 폐모를 주장한 역적 정인홍(鄭仁弘)이 퇴계 이황등 몇분의 문묘배향을 반대함에 부딪혀 권력에 아부하는 무리들에 미 움을 사게 되었다. 그때 선생은 성균관 재임(齋任 성균관 태학생중의 책임자 즉 반장과 같은 직함)으로 있으면서 잠시 시골에 내려가 있다가 이 소식을 듣고 몹시 분개하여 급거 상경 성균유생들과 상의 끝에 정인홍을 유학자의 명분인 靑襟錄(청금록)에서 삭제해 버린 것이다.그러나 광해군이 왕위에 오를 때 정인홍의 공이 많았던 까닭에 광해는 그를 몹시 아끼는 터이라 성 균관 유생명부 삭제 사건을 듣고 크게 진노하여 주모자를 투옥시키라는 엄명을 내렸다. 선생은 스스로 주모자라는 상소를 올렸고, 당시 재상으로 있던 한음 이덕형(李德馨)과 오성 이항복(李恒福)이 사태의 심상치 않음을 보고 왕에게 간청하여 가까스로 용서를 비는데 성공하여 일은 일단 무사히 되었다.정인홍의 유적 삭제 사건은 무마되었으나 광해군의 폭정이 날로 심해 선생 벼슬에 나가는 것에 환 멸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벼슬을 멀리할 바에는 아예 세상과 멀리하는 것이 옳겠다는 생각으로 17세때 고모부와 함께 가 본적이 있는 가평군 외서면 청평 잠곡동으로 은거의 길을 나서기로 하였던 것 이다. 이 때 그의 나이는 34세였고, 자녀로는 어린딸 셋이 있었다. 이 당시 觀史有感(관사유감)이란 시를 지은 것이 있으니 그에 이르기를 역사 읽기가 싫어졌다. 어린이는 반드시 화를 입고, 간신들은 도리어 영달하는 결과에 매번 눈물을 흘리곤 한다. 옛날이 이렇거늘 오늘의 슬픔이야 어찌 말로 다하랴. 이곳 잠곡동에 은거는 하였으나 생활의 근거가 없이 들어온 까닭에 굴을 파고 방을 꾸며 기거하면서 화전도 일구고 때로는 이웃과 품앗이도 하였다. 농한기에는 숯을 구워 서울에 갔다 팔아가며 농토등 생 활토대를 세워 나가면서도 틈을 타서 독서에 열중하였고, 학문에는 게을리 하지 않았다. 선생이 오래도 록 은거생활을 한 동기야 어떠하든 그는 심한 폭정에 박해나 피비린내 나는 정국을 외면하기 위하여 세 상을 등진 것이 아니었다. 차라리 구차하게 살바에야 어찌 벼슬길에 나갈 수 없었으랴, 그렇다고 해서 은사다운 행적을 취하지도 않았고, 선배다운 행세로 처세하지도 않았다. 오로지 백성이 으뜸이요, 그 들이 잘 살도록 되어야 한다는 민본(民本) 사상을 구현하기 위하여 자신부터 실천에 옮기는 은거에 열 중했던 것이다. 이렇게 10여년간을 육체적인 고통을 겪는 은거생활 중에서도 장남 佐明과 차남 佑明의 출생을 보게 되었다.광해 14년 金空(김유)에 의해 광해는 쫓겨나고 인조(仁朝)가 즉위하자 선생은 서울로 다시 올라갔 다. 이때가 그의 나이 44세였다. 1625년 3월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로 종5품직 벼슬에 재등용되고 이듬해 9월 음성현감으로 있으면서도 어전에서 베풀어진 과거에서 장원으로 합격하는 영광을 안았다. 그리하여 大枓에 급제하자 즉시 司諫院正言(사간원 정언: 정六품)이 되고 이어 병조좌랑(兵曹佐郞) 이 되었다. 1625년 을축 인조3년 2월에 사헌부 지평(持干)이 되어 2년간이나 주로 (대관)臺官의 일을 보았고, 홍문관 교리, 성균관 (직감)直講이 되기도 하였다. 그후 의금부 (사인)舍人, 세자시강원 (보 덕)輔德, 사간원 (사간)司諫, 병조참지, 우부승지를 거쳐 안변 도호부사(都護府使)가 되었다.이때부터 사서삼경등을 간행하여 교육에 힘을 기울이기 시작했고, 무예와 국방력에 훈련을 쌓는 훈련을 시켰다. 1631년 인조 14년 1월 명나라 사신인 동지사(冬至使)로 뽑혀 7월에 출발하여 떠났으나 병자호란이 발생하여 이듬해 6월에 귀국하였다. 1633년 인조 16년 6월 충청도 관찰사가 되자 당시 농민을 괴롭히던 貢物稅法(공물세법)의 병폐를 발견하고, 도내 전체 경작토지 상황을 세밀히 조사하여 그 숫자를 토대로 대동법을 실시할 것을 강력히 계청(啓請)하기도 하였다.1643년 12월 元孫輔養官(원손보양관)이란 직책으로 청나라 수도인 봉천(奉天)으로 갔다가 이듬해 7 월에 돌아왔는데 이는 병자호란때 볼모로 끌려간 소현세자의 장남 석철(石鐵)이 세자를 보러 가게됨에 따라 원손을 모시고 다녀온 것이다. 그 후에도 의정부 우참찬, 대사헌, 관상감을 엮임했고,1646년 6월 임경업(林慶業)을 본국으로 압송해 오는 임무를 선생의 일행에게 맡겼는데 임경업의 부하 하나가 도중 에 도망하는 사건이 일어나 귀국후 7월에 파직되었다.선생은 봉천·북경에 있는 동안 서양문명을 접할 수 있었고, 그때부터 그에 대한 무한한 동경을 느 꼈었다고 전한다. 그리하여 그러한 문물의 제도를 배워서 우리나라 백성도 편하게 잘 살아 보자는 의 욕이 생겨났던 것이다. 중국에서 돌아온 후 동전을 주조하여 유통을 원활히 하도록 힘을 기우렸고, 상 점을 개설하도록 하고, 수차(水車)를 만들어 농사에 크게 이바지해야 한다는 건의도 올린바 있다. 뿐 만 아니라 천문·지리에도 밝아 꾸준히 노력하여 舊歷法(구역법)을 폐지하고 時歷法(시역법)을 새로 쓰 게 하였다.나라의 경제·산업등 모든 제도가 고대적 형태로 머물러 있던 그때 이미 원시적 상업형태를 탈피하 려고 결사적인 노럭을 기울였으며, 용차(用車)를 주장하여 교통의 혁명을 일으켰고, 농사를 좀 더 과학 적으로 실시하고자 했으며, 농사짓는데 필요한 책력을 실제에 맞도록 저술하여 보급하기도 하었다. 1648년 7월 68세가 되어 都摠府 都摠管(도충부 도총관)에 임명되고, 이듬해 4월 開城留守(개성유수)로 전출되자 교육에 힘을 다했고, 포은 정몽주(鄭夢周)선생의 충성심을 찬양하기 위하여 순절한 곳에 성인 비를 세웠으며, 松都誌?을 많이 하였다.백성을 교학하기 위하여 시간의 여유만 있으면 문헌(文獻)의 간행을 보았는데 재임중에 「효충전 경」,「동몽선습」,「사략」 등을 간행하여 계몽과 권학에 힘을 다했다. 이러한 공로로 인하여 만 2년 의 임기를 마치고 상경할 때 개성부민(開城府民)들은 무한한 추모를 금치 못하여, 떠나던 날에는 수레 를 둘러싸고 못떠나게까지 하였으며, 노후들까지도 서로 부축을 받아가며 10여리 길을 메웠다고 한다.1649년 5월 인조대왕이 승하하고 孝宗(風林大君)이 즉위하였는데 선생은 國葬都監提調(국장도감제 조)라는 직책으로 국장을 총괄하는 최고 책임을 맡아보았고, 곧이어 대사헌에 임명되었다가 곧바로 우 의정에 오르게 되있다. 이때에 또다시 전국적으로 대동법을 실시해야 한다는 상소를 수차에 걸쳐올렸 으나 반대파에 부딪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나이도 이미 70이 지난터이라 자리를 후배에게 넘겨야 함을 평생의 진리로 삼고 있던 터이라 물러간다는 상소를 올린지 8번만에야 윤허를 얻기는 하였으나 판중추 부사(判中樞府事) 자리를 내려 청나라로 가야하는 進香使(진향사)가 되어 청국에 갔다가 돌아오기도 하 였다.1651년 효종 2년 정월 청나라의 압력으로 영의정 이경여(李敬輿)가 면직되어 고향으로 추방당하자 자리가 비어 효종은 잠곡선생을 영의정에 임명하고 사관을 보냈으나 즉석에서 사퇴한다는 상소를 올려 늙어서는 벼슬을 사양해야 한다는 신념을 밝혔으며 전날에 주장했던 대동법 실시문제도 뜻대로 안되는 정승은 할 까닭이 없음을 강조하였지만 효종의 간곡한 명령으로 승낙하기에 이르렀다. 그 후 인조실록 총재관이 되어 실록 편수 2년만인 효종 4년 7월 편수에 마쳤고, 영의정을 사퇴하고도 수차에 걸쳐 효종 이 총애로 국사에 참여하였으며,이때부터 대동법의 시행과 동전사용등의 실시가 이루어지기 시작했지만 또한 반대파에 의하여 큰 실효는 거두지 못하였다.위에서 본 바와 같이 민생을 위하여 많은 일을 단행했던 바에 못지않게 문화사업에도 빛나는 업적 을 남겼으니 그것은 다름아닌 활자의 제작과 인서(印書)의 간행이였다. 상평통보(常平通寶)의 주조와 명자호란으로 소실된 활자를 새로 제작하여 많은 서적올 간행했던 것이다. 그의 경제학은 실학의 원조 인 유형원에게 큰 영향을 끼쳐 실학의 선구적 역할을 했고, 성리학을 비롯하여 천문·지리·兵略·卜筮·律曆에 정통하였다. 그공로로 개성에 송양서원·가평의 잠곡서원·설악의 미원서원·강동의 청계서 원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