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몽인(柳夢寅)의 자는 응문(應文)이고 호는 어우당(於于堂) 또는 간제·묵호자(艮齋·默好子)이며, 본관은 고흥(高興)이다.
그는 1559년(명종 14) 柳 의 아들로 태어났다.일찌기 성혼의 문하에 들어가 배우고 1582년(선조 15) 24세에 진사가 되였으며,1589년 증광문과에 장원하여 암행어사가 되고, 1593년 문학을 역임하였다.
그는 학문의 깊이가 있었고 문장력이 뛰어났으나 성품이 경박하여 스승의 책망을 받고, 절교를 당하자 당시 이이첨등 대북파와 교류하며 중북파의 영추가 되고 스승인 성혼이 죽자 그를 모독하는 글을 지어 주위의 비난을 받았다.
선조말년 황해도 관찰사·좌승지·도승지를 역임하고,1612년(광해군 4) 예조참판에 이어 이 조참판이 되었으나 폐모론에 휘말려 이이첨과 대립하였지만 이에 적접 가담하지 않아 1623년 인 조반정때는 화를 면했으나 유응시의 고변으로 기자헌·유경종등이 반란을 일으킨 이괄과 내통할 우 려가 있다하여 체포되자 양주서산에 도피했으나 잡힌 후 김상헌등의 문초에 모반사실을 부인했으나 끝내 아들과 함께 사형되었는데 당시에 지은 노과부사는 너무도 유명하다.
그러나 그는 조선중기의 설화문학의 대가였으며 전서·해서·초서에 능통하였다. 그가 지은 어우 야담은 현재도 조선중기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묘는 가평군 가평읍 하색리 진동 능골에 있으며 정조조 (正祖朝)에 이르러 신원(伸寃)되어 이조판서에 추중되고, 홍양에 있는 운곡사와 고산에 있는 삼현영당 에 제향되어있으며 시호는 의정(義貞)이라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