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의 글은 가평이씨세보에 기록되어 있는 시조 이인보(李仁輔)에 관한 내용으로서간단히 설명하자 면 대강 이러하다.선대중에 이신이란 분이 중원(중국)으로부터 해동으로 들어왔는데 누대(屢代)를 완산(전주)지방에 서 살았다.
옛날 은나라 기자가 중국인 5천여명을 거느리고 평양으로 왔을 때 호종(扈從)한 것 같고, 그후 고조선 준왕(準王)이 위만의 난을 피하여 남쪽으로 내려 왔을때 금마군에 이른 듯하다.
한왕때에 이경의란 분이 좌명공신으로 대사도라는 벼슬을 얻어 완산군으로 봉(封)해 지면서 자손들이 여러대를 거주하였다.그 후 신라 중엽에 인보가 완산호장이 되면서부터 본관을 완산으로 하였다.
또한 별지 가첩에 전 하는 바에 의하면 완산군에 거주하면서부터 많은 후손들이 녹사(祿仕)에 들었고, 그 후 마한이 무너지 고 백제가 등극할 때 마한성에 두직(杜稷)을 수호하던 이긍휴가 마한국을 회복하려다가 죽었는데 그의 아들이던 인보가 의를 지키며 신하되는 것을 거절하고 백제인의 가촉(家屬)을 쫓아 목숨을 유지하였다.
신라시조 태조 박혁거세가 그 절의를 심히 가상히 여기어 중랑장으로 삼아 진한등 삼십육군을 멸하는데 공을 세워 동도원윤으로 이씨의 시조가 되었다고하는 기록도 있다.
그후 이기문이 경기도 가평군 조종 현으로 들어와 살면서 부터는 조종이씨 관명을 삼았고, 조선조에 이르러 이다림이 광주목사와 전농판사 를 지내고 병조판서에 증적되어 가평군으로 봉해 지면서부터 가평리씨라는 본관을 갖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