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보혁(李普赫)의 자는 성원(聲遠)이고, 본관은 용인으로 1684년(숙종 10) 10월 3일 증산현령으로 있던 이의진의 장남으로 가평읍 대곡리에서 태어났다.1706년(숙종 32) 음보로 사릉참봉이 되고, 1708년 연지판서가 되었으나 조부와 부친이 연이어 상을 당하매 물러났다가 익릉참봉을 거쳐 전성서 봉사, 의령고 직장, 사복시 주박, 의금부 도사, 청안현감, 온양군수, 전주판관, 평산부사, 평양서윤등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고, 1727년(영조 3) 성주목사가 되었다.
이듬해인 영조 4년에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자 그는 순찰사로 우방장이 되어 고령·지례·거창등 삼읍의 군사를 거느리고, 역신의 난을 토벌한 공으로 분무공신삼등으로 책훈되고 이어 인평부원군에 봉 해졌다.
그후 광주부윤이 되고, 1731년(영조 7)에는 강원감사로 나아가 선정을 베푼 연유로 떠나올 때 는 백성들이 그를 청송하며 비를 세워 기리기도 하였다.
이어 판결사로서 의금부 부총관, 호조참판, 성천부사, 곡산부사, 병조참판, 남양부사등을 역임하 다가 1738년 공홍도 관찰사로 재임중 남형(濫刑)을 이유로 파직되기도 했으나 다시 풍덕부사가 되었다.
이듬해에는 한성부 좌윤에 이어 안동부사로 나갔다가 홍부인의 상을 당해 돌아오고, 다시 참판·부사 의 일을 보았다.
1752년(영조 28) 지중추부사에 승진되고, 정헌대부로 의금부 도총관과 한성부판윤·공조판서가 되 고 숭정대부로 있을 당시 손자 이재협이 과거에 급제하니 조정에서 삼부자 즉 삼대가 과거급제를 한 것 을 가상히 여겨 선조대왕의 특명으로 판돈령부사에 특배되었다.
1762년(영조 38) 79세에 별세하고 묘 는 가평군 가평읍 대곡리에 있다. 후에 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좌의정에 추증되고 시호는 충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