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협(李在協)의 자는 여고(如皐)이고, 본관은 용인으로 시조 이길권의 31세손이자 예조판서 이경호의 아들로 1731년(영조 7) 12월 19일 가평읍 대곡리에서 태어났다.
1757년 정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전적,전랑을 거쳐 삼사춘방에 들었고, 암행어사가 되어 관동·영남·남양·한산·성주지방을 순찰하고 1765년 동부승지·좌승지로 승진하였다.
이어 병조·예조·형조참의·대사간을 거쳐 회양부사로 나갔다.1770년에는 가선대부 도승지가 되어 인릉군에 봉해지고 병조·예조·이조참판· 대사헌 좌우윤·중추부사도총관을 역임한 후 1782년(정조 2) 자헌대부 공·예·병조판서가 되고 다시 우참찬을 지내고 정헌·숭정대부로 승진되어 경기감사로 나갔다가 1787년(정조 11) 우의정으로 특배되고 이듬해 좌의정 그 이듬해인 1789년 일인지하만인지상의 영의정이 되었다.
그러나 그 해 겨울 홍병찬의 무고로 죄없이 축출되어 서울 광나루에서 병을 얻어 12월 24일 59세에 별세하고 말았다.그의 성격은 겸손하고 성실하여 매사에 사심이 없었고 오로지 국사에만 총실하였다.그는 영의정에 오를 기회가 일찍부터 었었으나 그때마다 사양하고 있다가 뒤늦게 영상이 되었다.정조대왕의 신임도 두터웠고 조신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았었다.
당시 정조대왕이 하교한 일화에는 이런 이야기도 었다."용인이씨는 그 가계도 오래되고 또한 이름난 조상들의 음덕으로 대대로 고관대작의 벼슬이 끊이지 아니하니 가히 대성이라 할만하다."정조대왕이 영의정 이재협의 부음을 전해듣고 크게 진노하여 사흘간이나 조정일을 보지 않았고 신 하를 보내 예우를 갖추고 치제토록 하였다.묘는 가평읍 대곡리 안말에 있고 조선국영의정 이재협이란 비가 세워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