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병세(趙秉世)의 자는 치현(穉顯)이요, 호는 산재(山齋)이며, 본관은 양주이다. 그는 1827년(순조 27년)에 현감 조유순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의리가 밝았으며, 불의를 보고는 참지 못하는 활달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음보(蔭補)로 참봉을 지내다가 32세시인 1859년(철종 10년)에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비로소 사관에 들어갔고, 1864년(고종 1년)에는 철종실록편찬에 참여하였다.
그후 1874년(고종 11년)에 함경도 암행어사가 되었고, 1877년에는 대사성으로 승진하였으며, 이어 서 의주부윤·대사헌등을 거쳐 1887년(고종 24년)에는 공조판서가 되었다가 이듬해 예조판서·이조판서 를 역임하고, 1889년(고종 26년)에 한성부판윤을 거쳐 우의정에 오르고, 1893년(고종 30년)에 좌의정이 되었다. 이듬해인 1894년 갑오경장으로 관제가 개혁되자 중추원 좌의장이 되고 이어고종의 고문격인 특진관이 되었으나 사직하고, 가평에 은퇴해 있었다.
1896년에 폐정개혁을 위한 시무책(時務策) 19조를 상소했고, 1898년에 의정부 대신에 임명되었지만 끝내 사양하고 나아가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1905년(광무 9년) 11월에 일본에 의하여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었는데 이는 노·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여러나라로 부터 한국에 있어서의 특수이익을 인정받 게 되자 곧 한국을 그들의 보호국으로 만들려는 획책이었다. 이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일진회라고 하 는 친일 단체를 만들어 보호조약의 필요성을 선전하게 하고, 일본 정계의 원로인 이또오를 파견하여 일 본공사 하야시와 함께 군대를 거느리고, 궁궐에 들어와서 황제와 대신들을 위협하여 보호조약을 승인토 록 강요하였다. 그리하여 조약이 거부되자 그들은 가장 강경하게 반대하던 참정 한규설(韓圭卨)을 회 의실 밖으로 끌어 내고, 외부(외무부)로 가서 외부대신의 도장을 갖어다가 강제로 합병조약에 날인하
여 버린 것이다.
이 을사조약의 내용은 한국의 외교에 대한 관계와 사무를 일본이 통치 지휘한다는 것이었고, 앞으 로 한국정부는 일본정부를 거치지 아니하고는 국제적 성질을 띤 어떠한 조약이나 약속도 하지 못한다는 것, 또한 일본이 한국의 외교에 관한 일을 관리하기 위하여 황제밑에 통감(統監) 한사람을 둔다는 것등 이었으니 요컨대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다는 것이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조병세는 억울함을 참지 못해 통곡하면서 「나라가 이미 망하였으니 나는 대 대로 국록을 먹던 신하로서 나라와 함께 죽음이 마땅하다.」고 말하고, 79세의 늙은 몸을 이끌고, 서울 로 상경하여 즉시 대궐로 나아가 목메어 울며, 「나라는 어느 한 사람이나, 한 집안의 사유물이 아니므로, 큰 일이 있을 때에는 임금이라도 혼자 서 결정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정한 법이 반드시 널리 원임대신 이품이상의 관원과 밖에 있는 유신들에게 까지 의논하여서 결정하는 것입니다.
지금 일본이 청구하는 5개 조항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데 한 두 신하가 임금님의 의사를 받들지 않고, 국법마저 따르지 않으며, 제 마음대로 가타부타하여 나라를 적에게 준단 말입니까? 법을 무시하고, 나라를 팔아먹는 그 죄는 일만번 죽어도 가벼울 것입니다.
주무대신 박제순이하로 可자를 쓴 각 대신을 빨리 국법으로 다스려서 공론(公論)에 사례하시 고, 곧 조서를 내리시어 조약을 취소하고, 각국에 성명을 내리소서, 만일 이러한 윤허(允許)를 받지 못 한다면 신은 천페(天陛)에 머리를 부수어 죽겠나이다.」하고, 강경하게 아뢰니 황제가 노령에 고생함을 위로하며, 인후병을 빙자하면서 물러가기를 청하였다.
그리하여 궁중에서 물러나온 조병세는 자신의 상소가 별로 이렇다할 효과를 거둘것 같지 않게 되자 원임 의정대신의 자격으로 각부에 통첩을 보내, 대소관원의 궁내 집합을 통고한 다음 특진관 이근명등 69명 연서로 불법적인 조약의 취소와 적신들의 처형을 요청하고, 또한 일본공사 임권조에게도 글을 보 내어 그들의 여러번 있은 우리 나라에 대한 독립보전의 약속을 어기고, 병력으로 의협하여 외교권을 강 탈하는 행동을 공박하며, 조약의 취소를 통해 국재적 신의를 지킬것을 요구하였다. 또한 영국·프랑스·미국·독일·이태리등 5개국 공사에게도 글을 보내어 공약을 어기고, 외부의 인장을 강탈하여 불법 조약을 조작한 사실을 지적하면서 이웃 나라 간의 의리로 국제공법의 규정을 살펴 회동(會同), 담판해 서 조약의 위법성을 성명(성토)해 줄 것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도 또한 뜻을 이루지 못하고, 11월 27일 일본 헌병들에 의하여 표훈원(表勳院)에 강제 구금당해 버리고 말았다. 조병세가 구금된 뒤 에는 민영환(閔泳煥)이 대신하여 백관을 거느리고, 대궐에 들어가 조약의 폐기를 요청하였지만 그도 역 시 연행되어 평리원에 구금되었다.
그후 조병세는 일본군에 의하여 강제로 가평에 추방되었으나 12월 1일 다시상경하여 대한문 밖에서 엎드려 강제조약의 폐기를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이때 일본 헌병들이 달려들어 그를 체포하여, 억 지로 교자에 태워가니 대세를 어찌할 길이 없었다.
이미 일사보국(一死報國)을 각오한 바 었는 조병세 는 교자속에서 미리 준비해 두었던 극약을 꺼내어 마시고, 집안의 조카인 조민희의 집에 당도 하였을때 는 이미 그의 용태가 위독한 지경이었다. 이에 당황한 일본 헌병들이 의사를 부르느라 수선들을 떨었으 나, 이때 이를 지켜보고 있던 사위 李容稙(註:이용직은 가평읍 금대리 출신으로 판의금부사를 지낸 이 희잡의 중손이다.
「이놈들아! 우리 대한의 대신이 나라를 위하여 가결코자 하는데, 너희무리들이 무슨 일로 간여하 며, 또 돌아가시는 분을 욕보이려 하느냐!」 하며, 크게 소리를 지르니 모두 도망쳐 버렸다.
이렇게 조병세는 죽으나 사나, 오로지 나라를 충성심으로 항거하다 순국하니 이때가 1905년 12월 1 일 오후였다.
조병세의 순국 소식을 전해들은 국민들은 너나 할것 없이 마치 자신의 부친상을 당한듯이 슬퍼하며, 애도했다고 하니, 그의 생애야 말로 한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관료로서 해야 할 바가 무엇인지를 보여준 귀감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이 소식이 조정에 전해지자 고종황제도 그의 충절을 아끼고 후회했다하며 황태자를 보내 특별한 예 우를 갖춰 장사지내도록 하고 시호를 충정(忠正)이라 내렸다.
그가 국민들에게 남긴 결고국중토민서는 너무도 유명하여 국민모두가 애송하였으며 내용은 번역문으로 소재한다.
오직 한빈 죽음으로서 국가에 보답하고 아래로 인민에 보답하노라 그러나 여한이 되는것은 국세가 회복되지 못하고 皇上의 위엄이 행해지지 못하는 것이라.
우리 전국 동포는 내가 죽는 것을 슬퍼하지 말고 각자 분발하여 나라를 도와서 우리 독립의 기초를 길러 나라가 망한 부끄러움을 설욕한다면나는 비록 구천지하에서 나마 춤추며 기뻐하리니 각자 분발하 여 힘쓰도록 하오.
그가 자결직전에 써서 올린 유서는 이러하다.
신의 죄는 깊고 정성은 엷어서 살아보았자 천의를 감동시킬 수 없고 역신을 제거하지 못하고 늑약을 제거하지 못한 즉 부득불 한번 죽음으로서 국가에 보답하려는 고로폐하께 영결을 고하노니 신이 죽은 후에라도 분발하시고 결단을 내리시어 박제순·이지용·이근택·이완용·권중현 등 5역신을 대역무도한 죄로 사형하시어 천지신인에게 사례하시고 각국공사에게 교섭하여 위약을 폐기하시고 국명을 회복하시 면 신은 비록 죽었을지라도 살아있는 것과 다를 것이 없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