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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적:관광명소

  • 낙은별곡의 남도진 관리자
  • 2010-07-13 00:00:00 2292
  • 남도진(南道振)의 자는 중옥(仲玉)이고 호는 弄丸齋·丸齋翁·樂隱岩主人·樂天堂主人등이며, 본관은 의령(宜寧)으로 1671년(현종 15) 10월 11일 남댁하의 두째 아들로 태어났다.어려서부터 문재(文才)가 특이하여 그를 신동이라 불렀고 총명하였다.

    16세(1689년)때 진사로 있던 유덕기의 딸과 혼인하였으며 20세후로는 학문에 뜻을 세워 경서 읽기를 즐겨하면서도 과정문자(약어)는 즐기지 않았다고한다.당시 대학자였던 삼연 김창흡선생도 남도진을 만나보고는 그의 재국(才局)이 범상치 않음을 본후 장차 훌륭한 재보(宰輔)가 되리라 하였으며, 일찌기 선고(先考)가 그를 우암 송시열의 문인으로 준재였 던 권상하의 문하로 보내 수학시키려 하였으나 시속의 선비는 문벌을 쫓아 허명을 취하고 있으나 나는 그런것을 원치 않는다고 하며 거절한 일이 있는데 이를 미루어 보더라도 그의 담백한 학구 자세가 얼마 나 투철했는가를 알 수 있다.

    1697년(숙종 24) 24세때 부친이 강원도 고성군수로 임명되자 함께 금강산을 유람한 후 유산록(遊山錄)과 기행가사인 봉래가를 지었고, 27세에 어머니상을 당하고, 36세때 부인 유씨를 잃었다.41세 되던 1714년 부친의 명에 의하여 갑오증광문과(甲午增廣文科)에 응시하였으나 시권(試卷)을 빨리 써가 지고 나와 이내 불살라 버렸으며, 43세에 주역을 읽은 후 계몽차기(啓蒙箚記)를 지였다.

    45세(1718년) 에 부친상을 당한 뒤 묘아래 움막을 짓고 지내면서 예서들을 읽고 예서차기(禮書箚記) 26권을 완성하였 다. 49세(1722년)에는 樂天堂說과 弄丸齋箴을 지였으며 50세 때 집안이 큰 실화를 입였으나 弄丸齋室 만은 재앙을 면하기도 하였다. 52세에 주역차기(周易箚記)를 짓고, 그 해 겨울에 선공감역(繕工監役) 으로 제수(除授)되였으나 나가지 않았으며,53세에 樂隱曲小序를 쓰고, 54세때 서울에 올라가 경제(京第)에 들리니 장남 득관이 당대의 이름난 화가 함세휘를 청하여 영상(影像)을 그리도록 하였으며, 그해 7월에 직접 자찬(自贊)을 써 넣였으며, 가을에는 이웃 고을의 산천을 유람하고 돌아와 역학입문서인 고 람역(考覽易)을 짓기도 하였다.

    55세 되던 8월에 또 다시 사옹원 봉사에 특배되였으나 나가지 아니하고 겨울에는 경서차기를 지었 다. 56세에는 향인과 종족간에 구휼(救恤)을 목적으로 계를 조직하고 목인임휼계(睦 任恤契)라 이름 하였으며, 직접 그 서문을 지어 넣었다. 60세에 장남 드관(得寬)을 잃고 상심하다가 병을 얻어 이듬해 8월 15일 세상을 뜨니 그의 유언대로 묘를 설악면 이천리에 썼다.

    이미 그는 24세때 부친을 따라 금강 산을 유람하고 돌아와 봉래가를 지었음을 전술한 바 있지만 그는 속세를 달관한 은인으로 영욕의 와중 을 벗어나 樂天知命의 분수대로 평범한 선비의 행색으로 산천을 왕래하고 水石과 사귀면서 때때로 낙은 암계곡을 배회하며, 깊은 시상에 잠긴 모습을 그리면 그의 천품과 은거의 실상을 대강은 짐작을 하리라.

    관로(官路)의 길도 열렸지만 나가지 아니하고 오로지 선비로서 산수풍월을 노래하며 그 속에서 자 연과 벗을 삼아 헌 베옷에 보리밥을 먹을 망정 이 쾌락은 정승판서와도 바꾸지 아니하고 황금과도 비길 수 없다고 노래한 낙은별곡 가사는 너무도 유명하다. 현재 설악면 방일리 농환재사당에는 그의 영정과 그가 지은 문집들이 보존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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