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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적:관광명소

  • 정치외교가 남정철 관리자
  • 2010-07-13 00:00:00 2311
  • 남정철(南廷哲)의 자는 치상(穉祥)이요 호는 하산(霞山)이며 본관은 의령(宜寧)으로 1840년(헌종 6) 4월 27일 남홍중의 아들로 태어났다. 명문대가의 후손으로 태어난 그는 용모가 출중했으며 7세부터 글공부를 시작하고,18세때는 유신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익혔다.

    그는 청년시절 조상 대대로 살아온 설악면 방일리에서 거주했던 관계로 10여리 안팍에 거주하던 화서 이항로의 아들 이박과 자주 왕래하며 학문을 토론했고 성재 유중교와도 교류를 맺였다.1

    865년(고종 2) 26세때 사마시에 합격하면서부터 전통유학자로서의 면모와 기풍을 가꾸며 학문에 전념하고 지내오다가 38세때 건릉참봉이 되었다. 1883년(고종 20) 44세에는 남학교수가 되였다가 예조 참의에 오르고 곧이어 동부승지·우부승지에 임명되였다.

    이듬해에 공조참판이 되었을 때 중국 천진에 주제하는 주진대원이 되면서부터 3차례나 천진에 가서 오장경·이홍장등과 만나 외교활동을 폈으며, 갑신정변때는 원세개진중에 편지를 보내 구원을 청한 결 과 정변을 좌절시키는데 큰 공을 세우는 수완도 발휘한 바 있다.

    이 당시 그는 이홍장과의 담화에서 의주에 거주하는 상인들이 호소해 온 인삼수출의 세율이 너무 과중하여 손실이 많다는 내용을 토대로 세율인하를 조절하기도 하였으며, 또한 중국상인들이 요구한 서 울 장안에 점포개설 문제에 대해서는 자국의 상인을 보호해야 한다는 차원에서 점포를 개설한다면 반드시 도성에서 10리밖에 한해서만 된다는 엄격한 결정을 내리기도 하였다.

    1885년(고종 22) 1월 또 다시 천진에 들어갔다가 보정부에 머물고 있던 흥선대원군을 만나고 돌아 온 후 한성부우윤·예조참판이 되였으며, 수차례나 중국을 다녀온 뒤 평안감사가 되었다. 그는 평양에 머무는 동안 삼희재란 서당을 짓고 황립을 훈장으로 임명해 후생교육에 전념해야 된다는 조치를 내린 바 있고, 한편으로는 광산개발에 대한 필요성을 역설하고 군사적 요충지인 평양의 병졸훈련과 보급에 원활을 요청하는 상소를 임금에게 올리기도 하였다.

    또한 전보국 기술자가 모두 중국인임을 알고부터는 그들에게 매달 일정액의 금전을 주면서까지 조 선 청년들이 배우게 한 일들은 특기할 일이다. 그는 훌륭한 인재를 등용시키는데도 뜻을 두어 당시 평 안도에 대표적인 유학자였던 박문일·박문오 형제를 조정에 추천하여 성사시키기도 하였다.1888년 54세시에 도승지·대사성이 되였는데 그는 이때 이미 정치가요 외교가 이며 유학자로서의 굳은 위치와 면모를 과시하였다.

    1893년 54세에는 외무독판이 되어 전권대신으로 오스트리아로 건너가 베커장군과 한·오통상조약을 맺였고, 쌀의 일본 수출이 늘어나자 국내쌀의 품귀현상을 막기 위하여 지방관에서도 방곡령을 내릴 수 있도록 상신한 결과 황해도와 함경도에 내려진 세차례의 방곡령에 대해 일본이 1개월 이전에 사전통보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배상청구를 하기에 이르렀는데 그는 일본공사 대석정기와 적 접 담판하여 배상금을 크게 낮출 수 있었던 것을 그의 뛰어난 외교수단이였다고 이른다.1895년 56세시에 모친상을 당하여 설악면 방일리에 머물고 였을 때 민비시해사건이 일어났으며, 아 관파천때는 러시아 웨베르공사와 만나 고종의 환궁교섭에 앞장섰고,1899년 59세에 내부대신이 되였으나 정치적 회의를 느껴 수십차례나 사직서를 올렸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05년 66세때 강화도 사고 에 다녀오던 날 밤 잠자리에 들였다가 을사보호조약의 체결소식을 들였으며, 그는 일선에서 이 조약의 폐기와 오적을 처단하자는 조병세·민영환·송병준등을 고종임금과 만나도록 주선해 주기도 하였다.

    1907년 68세에 장례원령이던 그는 순종황제의 등극을 축하하는 영조문을 지으라는 요구도 거절한 바 있고, 학부대신으로 있던 이완용이 순종황제 즉위식에 참석하도록 왕명이라고 불었을 때도 병든 신 하를 부를 이유가 없다고 끝내 거절하였다. 그런 연유로 인하여 왜경에 붙잡혀 1개월이나 옥고를 치렸 으며 재판 결과 곤장 80대의 구형을 받았으나 원로대신이던 덕으로 실형을 받지는 아니하였다.

    이렇게 하산 남정철은 권력에만 연연한 인물이 아니였고, 대학자로서 급변하는 정국을 헤치고 나가면서 끝없는 고뇌를 거듭한 인물이기도 하다.한일합병 당시 그는 병석에서 사경을 헤매고 있었는데 각부대신을 지낸 사람들에게 주던 작위를 하 산 남정철 자신에게는 물어보지도 않고 남작이란 직첩을 주였다는 기록이 하산집에 기록되어 있다.

    그는 고종의 명을 받고 애국가를 지였고, 시문에도 능했으며, 글씨도 명필이였는데 현재 덕수궁 정문 대 한문의 글씨도 남정철이 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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